'봄밤' 한예리 "20년 지기 김설진과 시한부 멜로 호흡 설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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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종 무용원 동기…김설진 "한예리, 백자처럼 은은히 빛나"
"죽음 가까이 있는 사람들…다른 차원의 사랑 볼 수 있을 것"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가을동화', '미안하다 사랑한다', '너는 내 운명', '눈물의 여왕'….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연인과의 사랑은 멜로 영화·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워낙 자주 쓰이는 설정인 탓에 때로는 클리셰로 여겨지기도 한다.
강미자 감독이 연출한 영화 '봄밤'의 주인공 영경(한예리 분)과 수환(김설진)의 이야기는 다르다. 한 사람이 큰 병에 걸리고 그를 위해 연인이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일반적인 시한부 멜로와는 달리, 영경과 수환은 함께 죽어 간다.
영경은 이혼 후 남편에게 아이를 빼앗긴 뒤 폭음으로 서서히 자살해가는 알코올중독자다. 사업을 망치고 노숙하던 수환은 류머티즘 관절염 치료가 늦어지면서 점차 죽음을 향해 간다. '봄밤'은 이런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며 겪게 되는 일을 그린다. 권여선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영경과 수환은 실제로 절친한 사이인 배우 한예리와 김설진이 각각 연기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신입생으로 만난 두 사람의 인연은 20년이 넘었다. 먼저 캐스팅된 한예리가 김설진에게 시나리오를 건넸고 김설진이 출연을 결심하면서 만남이 성사됐다.
"시나리오를 보여줬을 때도 설진 씨가 아니면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고 촬영을 마치고도 생각이 변하지 않았어요. 수환이 영경을 온전히 잘 봐줬기 때문에 영경이 더 빛날 수 있었다고 봐요." (한예리)
"한예리라는 배우와 작업할 수 있다는 게 제겐 흔한 기회가 아니잖아요. 현장에서 본 예리 씨는 백자(白瓷) 같은 사람이었어요. 주변을 해치지 않으면서 은은하게 존재감 있고 빛나는 느낌이었죠." (김설진)
7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두 배우는 "둘이 함께할 수 있어 설레는 작업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한예리는 "이번 영화가 내 마지막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강 감독의 말에 시나리오를 보기도 전에 캐스팅 제안을 수락했다. 한예리는 강 감독의 첫 장편 '푸른 강은 흘러라'(2008)에 출연한 연이 있다.
"강 감독님과 처음을 같이 했으니 끝도 같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한예리는 시나리오를 보고 "어떡하지" 하고 걱정이 앞섰다고 한다. 영경이 중증 알코올중독자 역인 데다 강 감독에게서 "아픈 게 눈에 딱 보일 정도로 말라야 한다"는 주문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도 마른 체형이었던 한예리는 초췌해 보이기 위해 운동은 하지 않고 절식하는 방법으로 5㎏을 감량했다. 김설진 역시 촬영 전에는 물조차 마시지 않으면서 총 10㎏을 뺐다.
덕분에 영경과 수환이 겪는 고통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더 극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후반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두 사람이 강추위를 뚫고 기어서 서로에게 다가가는 장면은 보는 이에게마저 아픔이 전이된다.
한예리는 "부서져 가던 영경을 하루라도 더 살아내게 하는 사람이 수환"이라고 소개했다.
"죽음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인 만큼 절박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서로가 없었다면 수환은 객사했을 거고, 영경은 술 마시다 집에서 죽었을 거예요. 그래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을 단순히 '사랑'이라고만 표현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김설진은 영경과 수환의 관계를 '카드로 만든 집'에 비유했다. 아슬아슬해 보여도 서로의 무게를 지탱해주며 집의 형태를 갖춘 모습이 영경과 수환을 닮아서다.
'봄밤'은 주인공들의 관계성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다른 멜로 영화와 차이가 뚜렷하다. 세부 스토리를 과감히 생략해 관객이 상상할 여지를 넓히고, 비슷한 장면을 반복해 보여주기도 한다. 간결한 대사가 시적으로 다가오지만 대사보다는 몸짓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한예리와 손꼽히는 현대무용수인 김설진의 조합이 빛나는 이유다.
김설진은 "촬영하면서도 회화적인 영화라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며 "숏폼 콘텐츠를 보면 8차선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를 바라보는 것 같은데, 우리 영화는 잔잔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같은 영화로 다가갈 것"이라고 자부했다.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올해 2월 '봄밤'을 포럼 부문에 초청했을 때 "슬픔을 다루지만 동시에 시와 빛,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한예리는 "요즘 보기 드문, 다른 차원의 사랑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가 상업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연급 배우로 발돋움한 이후에도 독립영화에 꾸준히 참여하는 까닭 역시 이와 비슷하다.
한예리는 "인물과 스토리가 납작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보다는 자기 이야기를 담으려는 연출자와 작업하는 게 더 재밌어서 작품을 폭넓게 선택하는 편"이라며 "(독립영화 출연은) 제 나름대로 사치를 부리는 것이지만, 좀 더 사람이 보이고 이야기가 있는 작품이 좋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