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품의 아프리카인] ⑶"리바운드로 태극마크 잡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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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 농구부 프레디 무티바, 2m3 큰키로 '골밑 지배'…"한국서 프로생활 갈망"
11월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 참가 주목…같은 민주콩고 출신 NBA 스타들이 롤모델
(서울=연합뉴스) 임경빈 인턴기자 = "한국에서 프로 농구선수로 활동하면서 태극마크를 달고 싶습니다. 그만큼 한국이 너무 좋습니다."
건국대 농구부 선수 프레디 무티바(23) 씨는 지난달 19일 충청북도 충주시 건국대 글로컬캠퍼스에서 가진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이같이 포부를 밝혔다.
콩고민주공화국(민주콩고) 출신인 그의 강점은 큰 키(203cm)를 살린 리바운드다.
2024년까지 3년 연속 한국대학스포츠협의회(KUSF) 대학농구 U-리그 리바운드왕에 올랐다.
올해도 리바운드 1위를 기록하며 골 밑을 지배하고 있다.
프레디 씨는 "팀원과 소통 덕분에 리바운드와 골밑슛 성공률이 높은 것 같다"며 "조직력을 중시하는 한국 농구가 좋다"고 말했다.
한국에 귀화해 국가대표에도 도전하려는 그의 목표는 당장 오는 11월 14일 2025 KBL 신인 선수 드래프트에서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는 것이다.
이를 위해 "몸싸움 훈련과 신체 균형을 잡기 위한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데드리프트 200kg을 들 정도로 근력도 키웠다.
무엇보다 부모님께 드래프트에서 지명받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한다.
12남매 중 아홉째인 프레디 씨가 마지막으로 가족을 만난 건 벌써 6년 전이다.
그는 "비자 등 문제로 인해 이제껏 한국에 부모님을 모시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이어 "가족들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며 "이따금 영상통화를 하면, 없던 수염이 생긴 동생 모습에 놀란다"고 말했다.
두 달도 남지 않은 KBL 신인 드래프트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힘을 내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작년에는 본업인 농구까지 잠시 멈출 생각도 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적인 선수만 KBL 신인 드래프트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귀화에 필요한 사회통합 프로그램 5단계를 취득하기 위해 휴학하고 한국어 공부에 전념할 생각이었던 것.
법무부가 운영하는 사회통합 프로그램은 외국인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 등 기본 소양을 습득하도록 설계된 제도로 0단계부터 5단계까지 나뉜다. 프레디 씨는 현재 3단계다.
다행히 규정이 바뀌면서 프레디 씨는 올해 드래프트에 간신히 참여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프로에 입단 뒤 2년 내 귀화 자격을 얻지 못하면 결국 민주콩고로 돌아가야 한다.
그는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어 하는 외국인 선수들이 많지만 귀화하지 않은 선수는 아예 출전할 수 없는 경기들도 있다"며 "외국인 선수가 보다 자유롭게 활동하고 귀화에도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프레디 씨는 문혁주 건국대 농구부 코치의 소개로 2023년부터 사회통합 프로그램 수업을 듣는 중이다.
그는 "각종 대회 일정 때문에 정해진 수업 시간을 채우지 못해 아쉽다"며 "그래도 문 코치님의 배려 덕에 5단계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힘들게 밟은 한국 땅에서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프레디 씨는 민주콩고에서 프로농구 선수로 활동하던 삼촌의 영향을 받아 12살 무렵 처음 농구를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삼촌이 뛴 경기를 보면서 선수들의 다양한 움직임과 슛에 매료됐다"며 "직접 농구공을 잡고 운동해 보니 너무 재밌었다"고 말했다.
고국 출신 미국 프로농구(NBA) 스타 디켐베 무톰보와 비스마크 비욤보를 보며 꿈을 키웠다.
프레디 씨는 "비욤보가 민주콩고에서 개최한 농구 캠프에 참여했던 경험이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2018년 4월 그는 일본의 한 고등학교 농구부에 입학했다. 키가 큰 센터 포지션 선수를 찾던 감독의 눈에 든 것.
그러나 일본 생활은 불과 반 년여만에 끝났다. 프레디 씨를 데려온 코치가 학교와 갈등으로 팀에서 해고됐기 때문.
일본에서 갈 곳이 없게 된 그에게 코치는 한국행을 제안했다. 마침 일본인 코치와 평소 친분이 있던 김승관 당시 휘문고 농구부 코치가 관심을 보였다.
프레디 씨는 "어느 날 김승관 코치님이 일본에 남을 건지, 아니면 한국에 갈 건지 물어봤다"며 "좋은 기회였던 만큼 주저 없이 한국을 택했다"고 말했다.
아프리카계 선수가 많고 귀화가 어려운 일본보다 한국은 경쟁이 덜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
그렇게 2018년 11월 휘문고 농구부에 합류했지만,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서툰 한국어 때문에 휴대전화 번역 앱으로 소통해야 했다. 일본보다 많은 훈련량에 지쳐 때로는 농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는 "수업이 없는 날엔 하루에 운동을 세 번이나 했다"며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농구선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마음을 다잡았다"고 밝혔다.
한국행을 이끈 아버지 같은 김승관 코치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은 큰 힘이 됐다.
고교 선배이자 현재 수원 KT 소닉붐 소속인 이두원·조환희 선수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프레디 씨는 "선수 부모님과도 자주 같이 밥을 먹었다. 특히 조환희 선수 아버님이 용돈까지 잘 챙겨주셨다"고 웃음을 보였다.
고교 시절 리바운드상 2번, 우수상 1번을 각각 수상하고 추계전국남녀중고농구연맹전 최우수 선수에 뽑혔다. 덕분에 2022년 건국대 농구부에 입학했다.
대학 농구부 훈련도 만만치 않았다. 개인 운동과 단체 연습은 새벽에 시작해 저녁에야 끝났다.
공강 시간이나 주말에도 운동에 매진했다.
졸업을 위해서 학교 수업도 병행했다. 수업과 과제를 도운 이는 프레디 씨의 '절친'이자 농구부 주장인 김준영(23) 씨다.
김 씨는 "프레디는 시험 때 모르는 답안이 있어도 성의껏 쓰려고 노력한다"며 "학점이 농구부원 중 중위권일 정도로 공부도 열심"이라고 귀띔했다.
운동과 학업에 여념이 없는 프레디 씨는 "한국에서 잘 생활하고 싶으면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고 같은 아프리카인들에게 당부했다.
그룹 아이콘(iKON)의 곡 '사랑을 했다'를 가장 좋아하는 프레디 씨에게 한국 생활은 노랫말처럼 '지우지 못할 추억'으로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