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들] 한화 김서현, '한국판 블래스'가 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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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마운드에서 18.44m 거리의 홈플레이트를 향해 공을 던지는 투수에게 가장 두려운 순간은 구속이 떨어질 때가 아니다. 투수 손을 떠난 공이 어디로 갈지 스스로도 알 수 없을 때다. 야구에서는 이를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Steve Blass Disease)'이라 부른다.
(대전=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 2025년 한국시리즈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한화의 김서현이 더그아웃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25.10.29
이 증후군의 이름이 된 스티브 블래스는 1971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영웅이었다. 이듬해 19승을 거두며 전성기를 누리던 그는 1973년, 아무런 전조 없이 갑자기 제구력을 상실했다. 부상도 없었고 구속도 여전했지만, 공은 스트라이크 존을 크게 벗어났다. 공은 땅에 박히거나 타자 머리 위로 날아갔다. 블래스는 그 길로 나락으로 떨어져 유니폼을 벗었다.
릭 앤키엘도 빼놓을 수 없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입단 때 리그 최고의 유망주로 선정됐던 앤키엘은 2000년 정규시즌에서 11승을 올리며 맹활약했으나 포스트시즌 1차전에서 3회 1이닝 동안 무려 5개의 폭투를 저지르며 강판당했다. 당시 메이저리그 역대 최악의 기록이었다.
마크 월러스도 야구사에 오점을 남겼다. 1990년대 애틀랜타의 특급 소방수로 군림하며 팀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안겼지만, 어느 날부터 공은 타자가 아닌 뒷그물을 향했다. 그는 이후 제구력 난조에 시달리며 트레이드된 뒤 마운드를 떠났다.
이 증상은 투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척 노블락은 철벽 2루수로서 1991년 아메리칸리그 신인왕을 거쳐 뉴욕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3연패(1998년~2000년)에 기여했으나 어느 순간 평범한 1루 송구조차 하지 못하는 증상을 보였다. 공은 관중석으로까지 날아갔고, 얼마 뒤 은퇴하고 나서 금지약물 복용 리스트에 올랐다.
한국 야구의 미래로 손꼽히는 한화 이글스의 마무리 김서현이 겪고 있는 진통은 이들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지난해 33세이브를 올리며 화려하게 비상했던 김서현은 올 시즌 볼넷이 비정상적으로 치솟으며 2군을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김서현 볼은 기다리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밸런스가 무너졌다.
김서현의 발작성 난조는 일관성 부족한 투구 메커니즘과 심리적 강박이 충돌한 결과라는 게 야구계의 분석이다. 150km 후반대 압도적인 구위를 가졌음에도 위기의 순간만 되면 공을 놓는 릴리스 포인트가 흔들리는 증상이 나타난다. 최근 구단의 투구 폼 수정 제안을 거부하고 본인의 방식을 고수하기로 한 김서현의 선택은, 그가 느끼는 심리 불안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방증한다.
김서현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빠른 공이 아니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여유와 배짱이다. 지난 시즌 막판 볼넷을 남발하다 강판당하자 더그아웃에서 몸을 떨며 눈물을 쏟는 모습을 보였다. 제구력도 중요하지만, 이런 그에게 더 절실한 건 담력인 것 같다. 올림픽을 앞두고 만원 관중의 소음 속에서 활을 쏘는 양궁 대표팀의 담력 훈련이 떠오르는 이유다.
김서현은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이 고통스러운 터널이 한국판 블래스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그러려면 한화 팬들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김경문 감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김 감독은 만년 하위인 한화를 맡아 지난해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올려놨는데도 팀이 지기라도 하면 공격 표적이 돼 온갖 비난을 받고 있다.
감독은 욕먹는 게 팔자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김서현은 다르다. 이제 스물한 살, 마무리 보직도 맡은 지 얼마 안 된 풋내기 청년이다. 그의 부침 앞에서 일희일비하기보다 따뜻한 응원을 건네야 할 때다. 한화 마운드의 뒷문을 지키는 소방수이기 이전에, 그는 아직 세상을 배워가는 청년임을 팬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